칼랑코에(메인 빛의 전사)의 원형은 14인 위원회에서 탈퇴한 1명. 에메트셀크의 쌍둥이. 쌍둥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사이좋은 형제는 아니었다.
그루(서브 빛의 전사)의 원형은 칠흑 비화 4에서 나오는 잠깐 언급되는 그 사람. 아마로트 출신은 아니고 원래 다른 곳에서 살다가 아마로트에 오게 됐다. 휘틀로다이우스와 먼저 친분이 생긴 후 휘틀로다이우스를 통해 에메트셀크를 알게 됨. 원체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여기저기 아마로트 밖을 떠돌거나 아예 집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기 일쑤. 에메트셀크가 사랑했던 사람. (연인일지 짝사랑일지는 설정 안함)
사라지지 않는 빛무리가 내려앉은 사닥다리 승강장의 앞.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마음 한뜻으로 승강기를 고치고 있다. 그 광경이 어쩐지 어색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을 들게 해서 칼랑코에는 그루가 앉아있는 박스 근처까지 물러나 그들을 가만 바라보았다.
소란스러운 풍경이다. 여러 사람들이 자재를 나르고 승강기를 정비하고 탈로스를 수리한다. 칼랑코에는 뒷목을 문질렀다. 어색한 감각이 심장 어느께를 자꾸만 간질였다.
되새기면 재해 이후의 일생에서 저는 언제나 짐승이었다. 들을 수 있는 것을 듣지 않았고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않았고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크리스탈. 하이델린의 가호를 받고 이상한 힘을 가지게 된 이후에도 딱히 변한 것은 없던 삶이었다.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저 휩쓸릴 뿐이었다. 어영부영 들어간 새벽에서도 사명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 보수를 받는다. 그뿐이었으니까.
그저 그런 인생이었다. 항상 그런 인생이었다.
달라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칼랑코에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인식의 변화는 시나브로 이뤄지고 있었을까. 그 영향의 처음은 분명 새벽 사람들이겠지. 칼랑코에의 눈동자는 데굴 구르며 알피노와 알리제, 야슈톨라와 위리앙제, 산크레드와 린을 향했다. 아마 그들에게 받은 애정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받은 것을 모른 척 한다하여 정말로 받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칼랑코에는 그걸 새삼스레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선은 기어코 마지막으로 그루에게 향했다. 형도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폐자재 위에 앉아 다정한 표정으로 레서판다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소곤거리고 있는 그는.
궁금한 것은 물어야 한다. 칼랑코에는 물음을 해소키 위해 입을 뗐다. 하지만 그게 이뤄지는 일은 없었다.
“오오…… 율모어의 시민이 일을 하고 있군……. 아주 그냥, 상황을 손바닥 뒤집듯 확 바꾸어 버렸잖아?”
제 말보다도 빠르게 내려앉은 말소리 탓이다. 칼랑코에는 몸을 조금 돌려 시선을 옮겼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에메트셀크는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말소리는 낮고 조곤조곤 했으나 귀에 쉬이도 박히곤 했다.
“사사건건 의견이 부딪히고…… 아무리 대화를 해도 합의가 안 되는…… 그런 상대와 결판내는 방법을 알아?”
알 리가 없었다.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에게서 일례를 떠올리기엔 칼랑코에는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온 시간이 더 길었다. 에메트셀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칼랑코에를 잠시 바라보다 이윽고 그루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느꼈을까. 레서판다와 놀아주던 그루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제 꼬마친구에게 보내는 시선과 달리 감정없는 무감각한 표정이다. 하기야 언제고 그가 사람에게 제대로 된 표현을 한 적이 있던가.
“힘이겠지. 권력, 무력, 재력. 그 어떤 것이던 우월할 수 있다면 약자의 의견 정도는 간단히 압살할 테니.”
힘. 칼랑코에가 그 말을 혀로 굴려보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의견이 압살된 약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에메트셀크는 칼랑코에의 생각이 깊게 이어지게 두지 않았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그가 대화를 이어간다.
“맞아. 가장 손쉬운 방법은 힘으로 짓눌러서 상대의 주장을 꺾는 거야. 알라그에서도, 갈레말에서도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지지했고 실제로도 빠르게 번영할 수 있었지.”
그 말에 칼랑코에는 조금은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무력도 권력도 가진 제노스는 정말 의견을 주장하기 쉬운 입장이겠구나, 하고. 개인적으로는 별로 만나고 싶지는 않다만. 그러고보니 저 사람도 몸뚱이는 제노스 쪽과 가족이던가. 이렇게 생각하니 더 어색하네.
“그런데 말이야, 싸워서 이긴 승자의 소망이 우선되는 상황이 되어도 패자 또한 존중받으며 일종의 화해에 이르는 경우가 있어. 그렇지만 그런 결말에 이르기는 아주 어렵단 말이지…….”
승자가 패자를 깔보거나 동정하지 않아야 하고, 패자가 승자를 원수로 생각하지 않아야 하거든. 말을 이어가는 에메트셀크의 시선은 그루에게서 떨어져 다시 칼랑코에를 향하고 있다. 율모어에 진입했을 때까지는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힘으로 사태를 진압했으리라 생각했다던 에메트셀크의 말에는 묘한 감정이 묻어났다. 칼랑코에는 그 감정이 어떤 건지 짐작치도 못했지만.
칭찬이라니. 잘하면 잘했다 못하면 못했다. 그냥 깔끔하게 하면 될 걸 왜 저리 복잡하게 말을 늘어놓는담. 아씨엔에게 받은 칭찬에 칼랑코에는 뒷목을 긁적였다. 역시 어색했다. 칭찬의 주체가 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칭찬을 받는 상황 자체가 어색했다.
에메트셀크는 사닥다리를 수리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그가 보이는 감정을 칼랑코에는 알았다. 추억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있었다고 읊조리는 에메트셀크의 목소리가 아주 머나먼 곳을 유영했다.
“좋은 세계였다. 평온하고 활력이 넘치고…….”
과거의 어느께를 더듬어가는 목소리. 사닥다리 승강장 위로 오르는 눈동자가 비추는 건 아마도 제가 보는 이 풍경이 아닌 다른 풍경이겠지. 이제는 칼랑코에도 그 정도의 눈치는 생겼다. 생각하지 않으려던 것을 생각하게 된 덕이겠지.
“웅장하고도 아름다웠던 아모로트 거리……. 높은 탑 위로 펼쳐진 하늘에선 햇빛과 바람이 쏟아져 내렸었지.”
입을 달싹이던 그는 다시 시선을 이쪽으로 돌린다. 자신과 그루를 훑는 시선에는 무어라 정의내리지 못한 감정들이 온통 뒤엉켜 있었다.
“……이렇게 말해 봤자 기억도 못 하겠지만.”
에메트셀크는 간혹 이해 못 할 단어를 곱씹었다. 간혹 이해 못 할 감정을 곱씹었다. 칼랑코에는 기억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였건만 그루는 가벼이도 단어를 던진다.
“당연하지.”
목소리가 간결하게 내리앉았다. 칼랑코에의 시선이 폐자재 위에 앉은 그루에게 향했다. 그는 발끝을 한들대며 레서판다의 이마에 가볍게 쪽, 입을 맞추고는 에메트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꼬마친구를 향해 웃어주던 웃음과 같았으나 달랐다. 사람에게 향하는 웃음은 저다지도 무감각하다.
그 표정을 칼랑코에는 아주 잘 알았다. 무수히 많은 싸움에 동료랍시고 함께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저 우연하게도 보게된 그의 여러 과거 탓이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 사람을 향해 저런 표정을 지어보인 그루는 언제나 녹슨 언어들을 상대에게 꽂아냈다. 마치 사람에게서 찾는 즐거움은 그게 전부라는 것처럼. 그루는 그것을 즐겼다.
“네가 추억하는 과거는 결국 너만의 기억이야. 우리들이 떠올릴 수 있을리가 없지.”
가벼운 목소리.
“아니면 기억해주기를 바랐어? 네 본래의 얼굴을, 너와의 관계를. 나누었던 그 모든 언어들을.”
녹슨 것들에 꿰뚫린 곳에는 녹이 남는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에메트셀크의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하염없이 그루를 훑었다. 응망하는 시선에 담기는 건 그루가 맞았을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었을까. 추억을 훑는다기엔 그 시선이 너무나도 선연해서 칼랑코에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제가 아는 것들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에메트셀크는 입매를 여러번 달싹이다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매가 휘어져 있어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불쾌해 한다기엔 목소리에 담긴 떨림이 깊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아는 척하지?”
“정말로 모를 거라 생각해?”
그루가 손을 들어올렸다. 거리가 있었건만 마치 에메트셀크의 목덜미부터 가슴팍까지 긁어내리는 듯한 손짓이었다. 손톱처럼 세워진 장갑의 끝부분이 날카로웠다. 에메트셀크는 장갑에 긁힌 가슴팍에서 피가 나는 것마냥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런 시선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생각해보면 에메트셀크의 시선이 간혹 그루에게 닿는 일이 제법 되긴 했다. 딱히 특별한 감정은 모르겠던데. 그루만 눈치챈 걸까, 아니면 그저 떠본 걸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정말로 그런 시선을 흘렸더라면 눈치 빠른 새벽의 일원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에메트셀크는 그루의 말에 입을 다물고 찡그린 표정으로 그루를 응망한다. 여전히 어떤 생각으로 그를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야슈톨라나 위리앙제라면 뭔가 눈치챘을까. 하지만 그 둘은 지금 이 자리에는 없다.
“됐어. 얘기는 대죄식자 토벌이 끝난 후에나 하면 되겠지. 어차피 승패를 지켜봐야 하니.”
그는 금세 등을 돌려 걸어간다. 칼랑코에는 에메트셀크에게 향했던 그루의 문장들을 생각했다. 기억해주길 바랐느냐고. 에메트셀크가 말하길 세계는 원래의 세계에서 14개로 나뉘어졌고, 아씨엔은 세계가 나뉘어지기 이전의 사람이고. 그렇다면…….
“아, 맞다.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넌 수정공의 실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그 후드를 벗은 맨 얼굴을 보며 얘기한 적은 있나?”
생각은 문장으로 끊어졌다. 칼랑코에는 그의 물음에 수정공을 떠올렸다. 이곳에 와서 후드를 벗은 맨 얼굴을 보며 얘기한 적은 없다. 그러므로 고개를 저었더니 그는 뭔가 저 혼자 납득한 듯 몇마디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가버리는 것이다.
칼랑코에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후드를 벗은 맨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다. 제1세계서는. 누구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상징적인 타워가 너무 뻔하게도 드러나 있지 않은가. 꽤 오래된 기억이었지만 잊어버린 기억은 아니다. 처음에는 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눈치도 생겼으니 정체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걸 금세 알아봤다.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을 텐데, 이제는 너무 오래 깨어있는 것 아닌가. 이런 걸 두고 뭐라고 하더라. 예전에 민필리아에게 들었던 잔소리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다 이윽고 정답을 찾아냈다.
맞아. 생활 리듬이 흐트러진다고 했었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고 뿌듯해하던 칼랑코에는 이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중에 수정공이 후드를 벗고 내 앞에 서면 꼭 말해야지. 자는 시간도 일어난 시간도 제대로 맞추라고. 생활 리듬이 흐트러진다고.